草書의 發興과 草書美가 書의 藝術性 확보에 미친 영향
황 태 현 동호정보교 교사.
Ⅰ. 들어가는 말
독일의 미학자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산물이며 이 작품의 생산자는 어떤 종류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정신적 존재 다시 말하면 '客觀化된 정신'의 한 특수형태에 속한다. 그것은 객관화, 바꾸어 말하면 정신적 내용이 대상성으로 드러난 것이다』이것은 작가의 살아있는 정신에서 빠져나간 내용이 물질 속에 들어가 하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물질적 바탕과 정신적 내용이라는 두 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물질적 바탕에 정신적 내용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관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서예술의 경우 이러한 현상관계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예술이 작가의 哲學있는 思想의 韻을 빌려 형태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글씨는 의미전달의 기호에 불과하지만, 글씨가 예술이 되는 까닭은 글씨 뒤에 박혀있는 작가의 인간성 즉 철학과 학문과 교양의 하모니가 버티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書藝가 藝術이 될 수 있는 관건은 바로 '작가의 情感을 移入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한 시대의 예술은 그 시대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예로 신라인들은 돌 다루는 것을 떡 주무르듯 하여 많은 예술품을 남겼으며, 중국 漢나라 때는 비석 건립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隸書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후 東晋時代에는 비석 건립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으로 인해 폐해가 많아짐에 따라 이를 금지하여 행서와 초서가 유행하여 발전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서예는 다른 조형예술과 달리 客體에 대한 재현을 위주로 하는 예술이 아니다. 서예는 문자를 빌어 직접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藝術이다. 그래서 형식미가 요구되고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할 文學, 歷史 哲學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書藝術이 국민예술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교육 정책적인 면이 먼저 수립되어야 할 것이며, 書藝家들도 覺醒해야 할 것이다. 대의적인 면을 생각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利益을 취하려는 小人輩적이고, 閉鎖的인 思考를 탈피하여 相互 공유에 의한 相互 發展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예를 전공하는 大學과 大學院이 생기고 여기서 學士와 碩士가 배출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다. 이러한 學問的 교육의 體系는 결국 작가의 創作活動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學問的 바탕이 되고 나아가 그 사회의 文化藝術 수준을 상향 조절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런 초서에 대해 或者는 "草書야말로 書藝의 진귀한 보물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초서가 가지는 形體의 美와 內面의 美를 표현하는데 書者가 表現하는 폭이 비교적 크고 자유로우며, 작가의 변화 무쌍한 성정을 표출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정체된 것은 시대성이나 학습의 난해성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藝術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草書 또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한다면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런 草書藝術의 정착과 발전을 위하여 선인들이 노력한 초서에 관한 이론들을 살펴보고, 초서의 출현과 書藝術의 기원과 아울러 초서의 형성과 배경, 그리고 書가 藝術로 인식되기까지 초서가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漢代의 초서와 관련된 사항을 살펴본 후 초서의 아름다움과 초서가 왜 활성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결론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서예는 문자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이므로 한자를 최초로 정리한 許愼의 사상에 대해서 검토했다. 그리고 資料 부족과 原文解釋 등 어려운 점이 많아 장지훈이 번역한 <중국서법문화대관>의 "漢人尙氣", 빈동철 논문 "중국초기 서법론 형성과 전개" 김재숙 논문 "중국초기 서법에 나타난 중국의 미의식" 이택후·유강기 저 "중국미학사" 등에서 원문을 원용 및 재인용했으며, 그리고 인용문과 참고문헌에 서법, 서도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한 본고에서는 대부분 서예라 표현했음을 밝혀둔다.
書藝術의 기원은 문자 창제 기원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문자는 實用的 功能에서 창제되었지만 그것의 창제는 자연의 형상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속에 審美的 功能이 內在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문자의 기원과 예술의 기원 등에 관한 사항이 종합적으로 분석되어야 書藝術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文字의 창제 (1) 結繩說 먼저 周易 繫辭傳에 상고시대에는 노끈에 마디를 맺어 다스렸다. 후세에 성인이 이것을 書契로 바꾸었다. 이로써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을 살피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노자 80장에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새끼 매듭지어 쓰게 하여라(使民復結繩而用之) 說文解字 敍에 옛날 포희씨가 천하의 왕 노릇을 할 때 우러러서는 하늘에서는 象을 관찰하고 굽어서는 땅의 따름을 관찰하였다. 새와 짐승들의 무늬가 땅과 어우러짐을 살펴서 가까이로는 몸에서 멀리는 만물에서 취하여 이로써 팔괘를 처음 만들게 되고 이로써 법도 있는 만물상을 드리워 나타내게 되었다. 신농씨에 이르러서는 새끼를 매듭지어 다스리고 일을 통괄하였다. 여러 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되니 꾸밈과 허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황제의 사관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욱을 관찰하여 갈라진 결로써 어떤 종류의 새나 짐승인지 관찰해낼 수 있음을 알게되고는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 이로써 백관을 다스리고 만물을 살피었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八卦, 以垂憲象. 及神農氏 結繩爲治 而統其事, 庶業其繁, 飾僞萌生. 皇帝之史蒼 , 見鳥獸 之跡,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百工以乂, 萬品而察.)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주 옛날 원시인들은 노끈을 꼬아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큰 마디를 맺고, 작은 일이 있을 때에는 작은 마디를 맺어 표시해 두었다. 그런데 이 결승은 文字가 발생하기 전에 새끼매듭으로 숫자를 세거나 약속을 기억하기 위한 원시적 記錄方法이다. 이후 후세에 聖人이 나와서 문자를 만들어 백관들이 그것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또 백성들도 그것을 잘 적어 두어 잊지 않았다. 후세에 성인이 문자를 造字할 때까지 상당기간 結繩으로 記事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八卦說 (3) 蒼 造字說 현재 전해지는 秦代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있는데, 즉 <蒼 三篇>이다. 이 三篇중에 <蒼 篇>은 李斯의 著作으로 그 첫 번째 句節이 "蒼 作書"라고 하였다. 또한 東漢의 許愼도 蒼 이 황제의 사관이라는 설을 따랐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周易 繫辭傳의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之以書契"에서 "上古"를 "神農"으로, "後世聖人"을 "皇帝之史蒼 "로 바꾸어 서술하였으며 蒼 이 문자를 만들게 된 동기까지 간략하게나마 확신을 가진 투로 설명하였다. 오늘에 와서 蒼 造字說의 긍정적 부분은 蒼 이란 사람이 中國文字의 根源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뿐, 한자를 蒼 이라는 사람 혼자서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蒼 篇>의 저자는 태고에 蒼 이 漢字를 만들었다고 믿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것은 <蒼 篇>의 序文에 蒼 作書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문자의 창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나, 中國文字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結繩, 八卦, 蒼 造字說 등은 전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사실로 認識되었을지는 몰라도 역사적인 사실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商代에 출현하는 甲骨文의 경우는 이미 成熟된 文字라고 學界에서 공인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면 '甲骨文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 문자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역사적인 자료가 없어 고증이 어려울 뿐이다. 고대 역사 문헌으로 볼 때 中國歷史에서 夏나라는 가장 완벽한 最初의 國家이다. 그렇다면 中國文字의 字符가 누적되기 시작한 시기는 하나라 초기로 볼 수 있는데 즉, 기원전 2100년 전후이다. 다시 말해서 商代 以前에 이미 文字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자의 변화과정을 순서대로 보면, 중국의 최초의 文字는 당연히 仰韶文化와 商代 사이에서 발생되었으며, 이 年代 범위 안에 있는 夏代는 자연히 文字를 가진 역사단계에 들어 선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들은 이후 中國 考古學의 발전과 함께 더욱 明確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1) 許愼의 生涯 (2) 說文解字 저술 許愼은 처음에는 今文學派의 학문을 배웠으나 당시 유명한 학자이자 古文經에 능한 賈逵(30∼101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古文學派로 돌아서게 되었고, 古文을 비롯한 , 篆文 등에 능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說文解字는 和帝 永元 12년(100년)에 완성되었고, 그 후 安帝 建光 元年(121년) 아들인 許沖에 의해 조정에 바쳐졌으므로 약 22년 동안 수정 보완한 셈이다. (3) 說文解字와 書藝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새, 짐승들의 발굽과 발자취를 보고, 무늬가 나누어진 것으로 서로 다른 구별이 가능한 것을 알아서 처음으로 書契를 만들었다.(『說文解字·敍』黃帝之史蒼 , 見鳥獸 之迹,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창힐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대개 같은 동류에 의거하여 모양을 본떴다. 그러므로 그것은 文이라고 이르고, 그 후에 모양과 소리가 서로 합쳐졌으니 곧 그것을 字라고 일컫는다. 文이란 상의 근본을 말하고, 字는 차츰 불어나는 것을 말한다. 竹帛에 쓰여진 것을 書라고 하는데, 書는 사실과 같다는 뜻이다.(『說文解字·敍』蒼 之初作書,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卽謂之字. 文者物象之本, 字者言 乳而浸多也. 箸於竹帛, 謂之書. 書者如也.) 창힐이 문자를 造字할 때 새와 거북이의 자취를 본떠서 드디어 문자의 모양을 정할 때, 같은 동류에 의거하여 形象을 본떠 書契를 만들었다. "文이란 象의 근본을 말하고, 상에 형을 합하여 字를 구성했다. 대나무와 비단에 쓰여진 것을 書라 하고 서란 따른다는 것이다(書者如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文字는 名을 서사한 부호이며, "대나무와 비단에 쓰여진 것을 書라 하는데, 書란 따른다는 것이다(書者如也)."라고 한 의미는 대나무와 비단 위에다 연속 배열시켜 문사를 이루어야 비로소 사상을 表達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書란 따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名이 文字를 書寫한 부호"라는 것에서 形象을 말한 것으로 漢字의 形體에 대한 可視性을 강조했으며, "비로소 대나무와 비단에다 연속 나열한다"라고 한 것은 書寫를 의미하는 것으로 서예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3. 書藝術의 기원 성인은 천하의 번다한 것을 보고 그 형상에 따라 그것을 모방하였다. 그 사물의 본뜸이 적합하였으므로 성인은 그것을 일컬어 상이라고 하였다.(繫辭傳 上 : 聖人有以見天下之 而擬諸其形容 象其物宜 是故 謂之象) 역자는 象이요, 象이란 것은 像(꼴)이다.(繫辭傳 下 : 易者 象也. 象也者 像也) 옛날 포희씨가 천하의 왕 노릇을 할 때 우러러서는 하늘에서는 象을 관찰하고 굽어서는 땅에서 법칙을 관찰하였다. 또 새와 짐승들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고장에 따라 각기 다른 온갖 초목들이 생존하는 형상)을 관찰하였다.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처음으로 八卦를 만들어 神明의 德에 통하고 萬物의 情狀을 類別하였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 與(天)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時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이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이런 卦象은 길흉을 점치는 단계를 넘어 意味가 확대되어 자연과 인류사회를 해석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象속에 현실 사물에 대한 모방을 포함시키고 동시에 미적 요소를 가미했다. 이런 점에서 藝術의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 옛날 중국 복희씨가 천하의 임금 노릇할 때 백성을 다스리는 데 뭔가 표상이 있어야 그것을 기준으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러러 위의 하늘을 보고 먼저 하늘을 상징해 작대기 하나를 긋고, 구부려 아래의 땅을 살펴 땅을 상징하는 작대기를 하나 그은 뒤, 중간은 사람으로 보고 또 작대기 하나를 그렸다. 그래서 세 개의 작대기는 天, 地, 人을 形象하게 되었다. 이렇게 괘를 그릴 때 작대기를 긋는 것은 단순한 작대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최초의 一劃이 書藝術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石濤는 苦瓜和尙畵語錄 一劃章에서 "한번 그음이라고 하는 것은 뭇 존재의 뿌리요, 온 모습의 근본이다."라고 하여 한번 그음이 八卦의 처음 작대기를 그은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八卦는 萬物을 抽象的으로 표현한 것인데, 팔괘를 그렸다는 것은 이미 後世에 繪畵에서 말하는 寫生의 法을 갖추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예술과 書藝術의 기원인 것이다. 또한 공자는 말하기를 글은 말을 극진히 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극진히 하지 못한다. 그러면 성인의 뜻을 알 수 없느냐?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象을 세움으로써 意(뜻)를 극진히 한다.(繫辭傳 上 : 子曰 書不盡言 言不盡意 然則聖人之意 其不可見乎 子曰 聖人 立象 以盡意) 여기서 "象은 意를 다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는데, 象은 하늘, 땅, 새, 짐승 등의 觀物에서 取象하는데, 取象된 物은 觀物된 物이지, 그 자체의 物이 아니다. 즉 審美對象으로서의 物象이다. 이런 사물의 순수동작인 物象을 取象하여 立象함은 盡意를 위함이다. 즉 상을 세워 그 뜻을 모두 표현한다(立象以盡意)는 것인데, 象을 통해 意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역의 卦象은 단순한 卦象으로서 의미 이외에도 美學的 意義가 내재되어 있으며, 또한 意는 순수 추상의 도리나 인사와 무관한 자연 법칙이 아니라, 개체의 지향, 정감, 이상, 성패 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자못 신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立象以盡意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예술형상의 창조와 상통한다. 이것의 구체적인 예는 정판교의 眼竹之竹은 觀物이고, 心竹之竹은 內在的 美的 象이며, 手中之竹은 立象以盡意와 같은 것이다. 이런 周易의 立象以盡意는 예술의 본질과 법칙을 파악하는 관건이 되었으며, 서예의 형상을 模寫하는 기본법칙이 되어 書論에서 원용되었다. 書藝術의 기원은 문자의 창제와 맥을 같이 한다. 문자의 창제가 팔괘, 결승, 창힐조자설 등에 기인하든 그렇지 않든, 문자는 계속 발전되었음은 주지한 바와 같고, 文字의 形體는 書藝術 形象의 物質的인 基礎가 되었다. 文字의 造字는 象形을 근거한 것이므로 文字라는 象으로부터 모종의 意를 표현할 수 있고, 藝術家의 내면에 자리한 정서적인 정감을 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자각되면서 서예는 예술로 인식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기가 漢代 이후이다. 4. 書藝術의 黎明 秦나라는 始皇帝의 독재가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에 점차 民心을 잃었고, 시황제가 죽고 얼마 안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BC206년 劉邦이 秦王朝를 滅亡시키고 새로이 漢王朝를 새워 都邑을 長安으로 정했다. 지금의 西安市이다. 이것이 바로 漢高祖이다. 한나라는 고조로부터 孺子 에 이르기까지 十四代, 二百十四년간(BC 202∼AD 8)계속되었는데 이를 前漢 또는 西漢이라고 한다. 前漢이라고 하는 것은 漢나라가 일단 멸망한 후 그 일족인 劉秀가 나타나 다시 왕조를 재건하여 後漢이라 하니 이것의 對稱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西漢이란 後漢이 지금의 洛陽市에 도읍을 정하니 長安은 서쪽, 洛陽은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前漢을 西漢이라 하고, 後漢을 東漢이라고도 한다. 이런 後漢은 劉秀가 재건하여 光武帝가 되었는데, 이로부터 마지막 황제 獻帝까지 모두 十四代, 百九十六年(25∼220)간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주목할 사항은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今古文論爭과 장례문화의 일환으로 비석건립이 유행하였으며, 유교를 국가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여 효도사상이 일반화되었으며 특히 후한의 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여 초서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前漢 때 書藝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항은 草書가 쓰이고 있었으며, 조정의 內外에서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조정의 예를 보면 漢書의 元帝紀 論贊을 보면 皇帝가 書를 잘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淸代의 유명한 역사학자 誠大昕(1728∼1804)의 『卄二史考異』의 成帝紀條에 자세히 考證되어 있다. 또한 漢書 外戚傳에 의하면 成帝의 王后도 皇帝와 같이 史書를 즐겨했고 和帝의 陰皇后와 鄧皇后, 順帝의 梁皇后, 安帝의 生母 左姬 등도 모두 學問을 즐겨 숭상했다고 한다. 西漢 元帝(BC 48∼33)때 黃門令 史遊가 역대 서예가와 민간 필기체의 精髓를 모아서 규범화한 急就篇을 처음으로 쓴 이후, 제왕의 중시와 객관적 발전의 필연성으로 인해 秘府에 列入되어 일시에 장초의 硏習이 풍조를 이루어 朝野 內外가 다투어 서로 傳受받아 익혔다. 동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북해왕 劉睦雅는 章草에 아주 뛰어났다. 明帝(AD 58∼75)는 더욱더 그 簡牘을 귀중하게 여겨 일찍이 그 글씨로 文章을 만들게 하여 감상하였다. 章帝(AD 76∼88)때 제나라 제상인 杜度 또한 章草에 뛰어났다. 章帝는 그의 書藝를 애호하여 그에서 章草로 上奏文을 쓰도록 명령했다. 라고 하여 학문과 글씨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시대의 元帝 또는 成帝時에 와서 일반사회에서도 書를 귀중히 여기게 되었다. 예를 든다면 谷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字를 子雲이라고 했다. 漢書 遊俠傳에 의하면 谷永은 書를 좋아하여 당시 세상의 평판이 높았다. 또 같은 시대의 인물로 東遵이라는 자가 있어 이 사람도 역시 書를 좋아하고 편지를 받으면 누구의 것이든지 모두 귀중히 보존하였다고 漢書 遊俠傳에 전한다. 이 같은 현상은 書가 藝術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이는 原始書藝術時代로부터 自覺的인 書藝術時代로 이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어떤 특정한 개인의 필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불 수 없었던 현상으로써 이것은 일반사회의 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證據하는 것이며, 일반사회의 書에 대한 높은 관심이야말로 書가 藝術性을 확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이택후·유강기의 <中國美學史>에 의하면 중국 문자의 書寫발전은 극히 높은 예술성을 지닌 오랜 역사 시기를 거쳤다. 갑골문의 서사는 오늘날 볼 때, 분명히 미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 후 청동기 銘文에 쓰여진 글자, 秦代에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는 일 및 한나라 초기에 書藝을 응용하여 건축 편액에 사용한 서사 등, 모두 서법 예술의 유력한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서법이 정확하게 일종의 독립된 예술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東漢 後期부터이다. 라고 하여 漢나라 초기에 이미 서예가 응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書藝의 심미의식의 자각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후 동한 말부터 書藝가 독립적인 예술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서복관의 견해도 이와 유사한데 그의 저서 <중국예술정신>에서 서예 자체에서 미적 자각을 하면 미적 대상으로 삼게 된 시대에 발생하는데, 이것은 東漢末에서 시작되어 위진시대에 확립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촉발시킨 것은 아마도 초서의 출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서는 간편함에 대한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지만 글씨체의 흘러가는 듯한 변화로 말미암아 글씨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용이하였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문자를 실용적 성격으로부터 유희의 성격을 띤 예술영역에 이르게 하는 교량 역활을 하게 되었다. 라고 하여 서예가 예술로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 東漢末이며 위진시대에 확립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종합하면 書藝術의 태동은 前漢이며 이때부터 서서히 체계화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草書가 發現해서 번성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서복관의 주장대로 결국 "書藝가 藝術로서 自覺하기 시작하는 것은 비로소 草書가 출현하면서부터 實用的 성격으로부터 遊戱的 성격을 띤 예술영역으로 이르게 된다"고 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1. 草書의 發興 초서의 출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漢나라 말 趙壹이 지은 <非草書>에 대저 초서가 흥기한 것은 가까운 고대로 부터이다. …대저 진나라 말에 형벌이 엄하여 관청의 문서가 번거롭게 되었고, 전쟁이 일어나 군사의 일을 알리는 것이 빗발치듯 바쁘게 되자 예초를 만들어 이를 급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였다(夫草書之興也 其於近古乎… 蓋秦之末 刑峻稠密 官書煩冗 戰攻竝作 軍書交馳 羽 紛飛 做爲隸草 趣急速耳 ). 라고 하였으며, 또 정상옥은 <서법예술의 인식론>에서 秦시대 諸侯들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상호간에 급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 羽書를 보내거나 烽火를 올리고 役馬 疾走하는 急迫한 상황에서 篆書나 隸書로서는 筆劃이 복잡하여 급하게 書寫해서 구원을 청하기가 어렵다. 急迫한 狀況에 처하여 급하게 서사할 수 있는 요구에 의해서 초서가 생겼다. 또 梁武帝는 <草書狀>에서 채옹의 말을 인용하여 옛날 진나라 때 제후들이 서로 우열을 다투었는데 서신이나 격문을 서로 전하고 봉화를 바라보며 역참을 달리는 상황에서 전서나 예서의 어려움으로는 급박함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에 긴급에 대응하는 서체를 만들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초서가 바로 이것이다(昔秦之時 諸侯爭長 簡檄相傳 望烽走驛 以篆隸之難 不能救速 遂作赴急之書 蓋今草書之也) 라고 하여 초서의 발생 시점을 秦나라 말엽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漢代에서 草書가 번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먼저 許愼은 <說文解字> 敍와 衛恒의 四體書勢에서 각각 漢代에 초서가 있어 번성하였다(漢興有草書). 漢나라가 흥하면서 초서가 있었다(漢興而有草書). 라고 하였다. 또한 庾肩吾는 <書品論>에서 말하길 초서는 한나라 때 일어나 예서의 필법을 흐트러 급하게 쓰는 데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본래 草書가 만들어진 뜻이다. 그러므로 초서라 부른다. 건초 중엽에 경조 사람인 두조가 처음 초서를 잘 쓴다고 이름이 있었으니 지금의 草書가 바로 이것이다(草書起於漢時 解散隸法 本因草創之義 故曰草書 建初中京兆杜操 始以善草知名. 今之草書是也). 라고 하였다. 또한 神田喜一郞 著, 李憲淳·鄭充洛이 번역한 <中國書藝史>에서는 前漢 시대에 草書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니, 그 초서를 章草라고 하여 波策이 있는 隸書를 簡素化한 것과 草隸라고 하여 古隸를 간소화 한 것 등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前漢末期부터 두 가지 종류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古來의 傳說에서는 章草는 前漢元帝時代에 史遊라는 사람이 발명했다는 설과 後漢 章帝가 발명하였다는 설 등이 있는데 모두 믿을 수 없다. 라고 하여 초서의 발생이 漢代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草書의 出現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초서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秦나라 末이나 漢代의 일반 백성들로 당시 그들은 급하게 글을 쓰려고 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예서의 형태를 점점 흐트러뜨려 그것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초서가 자체연변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역시 민간의 지지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證據하는 것이 趙壹의 <非草書>에 있는데 草書를 쓰는 사람은 대개 재주가 작은 것에 의지하는 사람이다. 시골에서는 이것으로 그 능력을 비교하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이것으로 시험보지 않으며, 박사도 이것으로 시강하지 않으며, 四科에도 이것이 들어 있지 않으며, 초빙을 하는 데도 이것에 대한 능력을 묻지 않으며, 성적을 고려하는 데 이것으로 매기지 않았다(趙壹 <非草書> 草書之人蓋之藝者耳 鄕邑不以此較能 朝廷不以此科吏 博士不以此講試 四科不以此求備 徵聘不問此意 考續不課此字). 라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草書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草書가 민중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草書의 지위가 낮았더라도 그것은 民衆의 승인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書藝術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士大夫의 감상용으로 머물게 되었더라면 그것은 다시는 민간에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작용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2. 崔瑗의 草書勢 (1)최원의 생졸 (2)최원의 草書勢 처음 蒼 로부터 중국 옛날 글자가 시작되매 저 새의 발자취를 따서 문장을 썼다. 이것이 말엽까지 미쳐 전적(典籍)이 더욱 번성하고, 사람의 간사함이 많아졌으며, 정치에 권세의 작용이 많아졌다. 관청의 일이 거칠어지고, 기록하는 일이 거칠어져, 이에 예서(隸書)를 만들고, 옛날 글자는 버렸다. 초서의 법은 대개 우선 간략하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며 자취를 논하는 것으로, 급한 경우에 쓰는 것이다. 공(功)과 용(用)을 함께 하여 시간을 아끼고 노력을 아낄 수가 있으니 보다 검소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굳이 옛날 법식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는가?(書契之興 始自 皇 寫彼鳥跡 以定文章 爰 末葉 典籍彌繁 時之多僻 官事荒蕪 剿其墨翰 惟作佐隸 舊字是刪 草書之法 蓋又簡略 應時論指 用於卒迫 兼功 用 愛日省力 純儉之變 豈必古式) 그 법상(法象)을 살펴보니 부앙(府仰)에 법도가 있다. 방형인 듯 싶으나 곱자에 맞지 않고, 원형인 것 같으나 그림쇠에 맞지 아니한다. 왼쪽이 들어가면 오른쪽이 올라가서 바라보면 한쪽으로 기운 것 같다.(觀其法象 俯仰有儀 方不中矩 圓不副規 抑左揚右 望之若 ) 발돋움하는 새가 멈칫하며 금방 날려는 듯하고, 교활한 짐승이 놀라 금방 달릴 듯한 모습이다. 점(點), 주(駐) 등 점을 찍은 형세는 염주처럼 끊겨는 있으나 분리되지는 아니하였다. 쌓인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방일(放逸)하고 기이한 모습에 만든다. 혹은 깊은 곳을 뛰어 넘고서 겁을 먹은 듯, 혹은 고목에 의지하여 위험한 곳에 임한 듯, 방점을 비스듬히 옆으로 붙인 것은, 혹 매미가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듯하다. 필세가 끝나서 남은 실타래가 맺히는 것은, 마치 산 벌이 쏘려고 틈새를 엿보고, 나는 듯이 구멍으로 들어가는 뱀이 머리는 없고 꼬리만 끌 듯이 한다. 그러므로 멀리서 보면 마치 무너진 낭떠러지 같기도 한데 가까이서 보면 한 획도 옮길 수가 없다. 교묘하고 정치하기 짝이 없어, 때에 임하여 편의 함에 좇은 것이다. 대강을 약술하니, 이상과 같이 비교해 본 것이다.( 企鳥 志在飛移 狡獸暴駭 將馳未奔. 或黜點染 狀似連珠 絶而不離 絶而不離 蓄怒 郁 放逸生奇 或凌遽而 慄 若据槁而臨危. 傍點邪附 似螳螂而拘枝 絶筆收勢 餘綎 結 若山蜂施毒 看隙緣峨 騰蛇赴穴 頭沒尾垂 是故遠而望之, 焉若注岸奔涯, 就而察之卽 一 不可移. 纖微要妙 臨事從宜.)『前後漢文』제45권 이상 최원의 초서세를 분석하면 초서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관청의 일이 거칠어지고, 기록하는 일이 거칠어져, 이에 예서(隸書)를 만들고, 옛날 글자는 버렸다. 초서의 법은 대개 우선 간략하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며 자취를 논하는 것으로, 급한 경우에 쓰는 것이다. 공(功)과 용(用)을 함께하여 시간을 아끼고 노력을 아낄 수가 있으니 보다 검소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굳이 옛날 법식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최초의 초서의 탄생은 실용적인 必要性에 기인한 것이지 篆書, 隸書와 같이 다른 새로운 書體를 창조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草書는 實用的인 측면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 미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예로 갑골문의 경우 심미를 주요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능동적으로 審美對象으로서 자각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 본래의 실용적 의의는 소실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심미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草書가 藝術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며, 당시 이런 초서의 등장은 기존의 文字 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것이었다. 예로 趙壹이 非草書에서 초서의 유행을 비판한 것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초서가 널리 확대되고 아울러 초서가 연구됨에 따라 초서가 예술로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초서가 書者의 感情表出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篆·隸書의 均齊美를 뛰어넘어 均衡美를 확보함에 기인한다 하겠다. 또한 최원은 초서의 형식미에 대해 그 法象을 살펴보니 府仰에 법도가 있다. 방형인 듯 싶으나 곱자에 맞지 않고, 원형인 것 같으나 그림 쇠에 맞지 아니한다. 왼쪽이 들어가면 오른쪽이 올라가서 바라보면 한쪽으로 기운 것 같다.(觀其法象 俯仰有儀 方不中矩 圓不副規 抑左揚右 望之若 ) 觀其法象은 주역의 觀物取象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立象함은 盡意를 위함이라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것은 현실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象을 통해 意를 드러내는 것으로 草書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 자연 사물과 관계지어 설명함으로써 서예가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초서는 전·예서가 가지는 均齊美와 달리 均衡美를 가지는데 이는 不均衡속에서 均衡이 있고, 서있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 향수자로 하여금 긴장감 내지는 아름다운 감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초서의 書勢는 강력한 運動感에서 오는 생명력이다. 이에 최원은 초서의 생명운동과 운동감에 대하여 발돋움하는 새가 멈칫하며 금방 날려는 듯하고, 교활한 짐승이 놀라 금방 달릴 듯한 모습이다. ( 企鳥 志在飛移 狡獸暴駭 將馳未奔) 마치 산 벌이 쏘려고 틈새를 엿보고, 나는 듯이 구멍으로 들어가는 뱀이 머리는 없고 꼬리만 끌 듯이 한다(若山蜂施毒 看隙緣峨 騰蛇赴穴 頭沒尾垂). 이런 무한한 생명력과 運動感의 生成은 動的 표현의 실현에서 오는 結體로서 표현되는데, 정지된 상태이나 그 속에 강렬한 기세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緊張感을 느끼게 한다. 특히 狂草의 경우는 書者의 感情表現의 극대화로 二次元 空間上에 표현된 視覺藝術로 하여금 時間藝術 및 음악적 리듬감을 느끼게 하여 실제 靜態이지만 동태의 形象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서의 규율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초서가 주관적이며 임의적인 것으로 변화 중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고도의 자유로움이 있지만 또 그 자체의 규율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보면 한 획도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초서가 극히 자유로우면서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이러한 자유로움 중의 合法則性이 草書의 美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3. 趙壹의 非草書 <非草書> 이 한편의 書論은 확실히 의심할 바 없는 專門的인 書藝 비평문이다. <法書要錄> 등에 모두 이 글이 실려 있다. 초서와 관련하여 그의 비평의 의향은 두 가지 방면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道를 크게 하여 세상을 일으키는(弘道興世) 학문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는 당시 사람들이 모두 草書의 大家를 본받아 배우는 것이 마치 찡그린 자를 흉내내어 추함만을 더한 것과 같고, 그것은 無益한 것일 뿐만 아니라 草書의 本意에도 위배되었다는 것이다. 趙壹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바의 하나는 草書本體이고, 하나는 당시 선비들의 세상 풍조였다. 당시 선비들이 草書를 연습한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대해 趙壹은 깊이 파고들어 그 스승 삼는 서예를 연구하면서 피로를 잊는다. 저녁에도 삼가 쉬지 않으며 해가 기울어질 때에도 밥 먹을 겨를이 없다. 10일에 한 자루의 붓, 한 달에 몇 개의 먹을 다 써버릴 정도다. 옷깃과 소매는 까만 옷 같고 입술과 이는 항상 검다. 비록 사람들과 더불어 앉아있더라도 농담할 겨를이 없다. 손가락을 펴서 땅에다 그림을 그리고 도토리 열매로 벽에다 그림을 그린다. 팔꿈치가 벗겨져 피부가 상하고, 손톱이 갈라지고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쉬지 않는다. (趙壹,「非草書」鑽堅仰高 忘其疲勞, 夕 不息, 不暇食. 十日一筆, 月數丸墨. 領袖如 , 唇齒常黑. 雖處衆座, 不遑談 , 展指 地, 以草 壁, 臂穿皮括, 指爪 折, 見 出血, 猶不休息(輟).) 라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초서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선비들이 草書를 잘 쓰는 것은 政治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그리고 草書를 못써도 世上의 뜻을 구하는데 또한 아무런 손해가 없다. 그러므로 草書와 世上事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팔굽치가 벗겨져 피부가 상하고, 손톱이 갈라지며 관자뼈에서 피가 나오도록 초서를 연습한다"라는 것은 초서가 기존의 문화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신식인 초서를 비난한 것이다. 이러한 비평은 文化史的인 입장에서 보면 정확한 것이고, 儒學의 濟世思想과 부합된다 하겠다. 또한 사람들이 草書를 열심히 배우지만, 오히려 草書를 理解하지 못하고, 쉽고 빠르다는 草書의 個性과 특징과는 달리 그 學習方法과 知識이 위배되었으며, 또한 "自己의 個性에도 위배되었다." 라고 하면서 초서의 출현에 대해 전술한 바와 같이 "진나라 말이 급하고 빠른 취지로 초서가 생겨났다"고 하였으며, 초서의 생성 배경과 實用功能에 대해 단지 복잡한 것을 깎고 번잡한 것을 생략하고 복잡한 것을 없애고 간단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쉽게 쓰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을 취하는데 힘쓴다.(趙壹,「非草書」但貴刪難省煩損複爲單, 務取易爲易知.) 草書 本來의 뜻은 쉽고 빠른 것인데, 지금은 반대로 어렵고 느려서 草書의 많은 뜻을 잃어버렸다("草本易而速, 今反難而遲, 失指多矣.) 라고 하여 "草書는 본래 쉽고 빠르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렵고 느려서 그 뜻을 잃어버렸다"라는 것은 초서 본래 목적 즉 實用功能을 상실하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기존의 문화현상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草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같은 현상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草書를 쓰는 사람은 대개 재주의 작은 것에 의지하는 사람이다. 시골에서는 이것으로 그 능력을 비교하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이것으로 시험보지 않으며, 박사도 이것으로 시강하지 않으며, 四科에도 이것이 들어 있지 않으며, 초빙을 하는 데도 이것에 대한 능력을 묻지 않으며, 성적을 고려하는 데 이것으로 매기지 않았다(趙壹 <非草書> 草書之人蓋之藝者耳 鄕邑不以此較能 朝廷不以此科吏 博士不以此講試 四科不以此求備 徵聘不問此意 考續不課此字). 또 趙壹은 草書가 "聖人의 學問은 아니다(非聖人之學)."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반면 杜度·崔瑗·張芝의 草書 성취에 대해서는, 그들의 재능과 노력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보이는 반면 이에 대한 폐단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 "무릇 杜度·崔瑗·張芝는 모두 속된 것을 超越하고 둘도 없는 재주가 있었다. 學問을 널리 익히고 시간이 날 때는 草書를 쓰면서 손을 놀렸는데 後世에는 이것을 사모해서 따라 한다고 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도·최원·장지의 초서 성취는 그들이 학문을 널리 익히고 난 후의 결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좋은 草書를 쓰고자 할 때는 먼저 학문적 재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學問的 재량이 없으면 바로 "열흘에 붓 한 자루가 닳고, 한 달에도 몇 자루의 먹을 소비하면서, 소매는 검은 비단과 같고 입술과 치아는 항상 검은 상태라도 이룰 수 없으며" 이것은 "찡그린 자를 흉내내어 찡그릴 뿐이고, 걸음걸이를 배우는 자가 리듬을 잃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무릇 인간에게는 氣와 血을 별스레 취급하니, 서로 다르고, 뼈와 근육도 다르다. 마음에도 疏密이 있고, 손에도 잘하고 못하는 것이 있다. 글씨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마음과 손에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마치 사람의 얼굴에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있듯이 어찌 學으로써 서로 같아질 수 있겠는가?(趙壹,「非草書」凡人名殊氣血, 異筋骨. 心有疏密, 手有巧拙. 書之好丑, 在心與手, 可强爲哉?) 라고 하여 草書는 자기만의 면모가 있어야 하고, 맹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趙壹의 草書에 대한 비판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당시 선비들의 초서 학습이 너무 지나쳐 유교경전의 학습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은 학문의 본령이며 덕을 쌓고 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만, 사람들이 草書에 빠져 있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찾는 것이며 正業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였기에 그가 보기에 草書는 명백히 聖人의 業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草書는 학문적 재량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草書에 깊이 빠질 수 없고, 藝術的인 성취가 불가능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草書를 비난한 면도 있겠지만 초서의 우수성도 역설적으로 주장한 부분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書藝術의 성취에 대한 그의 書藝術觀 즉, 書者의 個性의 發現에 관한 견해이고 나아가 그의 서예미학 사상을 읽을 수 부분이다. 체본에 의존하는 현대의 서가들도 깊이 새겨 보아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다음은 篆書와 隸書는 문자를 창제한 성인의 뜻에 부합하지만, 草書는 쉬운 것만 취해서 쉽게 아는 것이므로 그 뜻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층, 상층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 낸 草書藝術이 草書가 만들어진 당시의 성격 즉 實用性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조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항들은 기존의 문화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 즉 보수적 입장으로 신 문화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흐름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 草書의 계승 1단계 : 篆書 筆意 위주의 章草 : 장초의 발생기 東漢 때 章草가 민간에서 폭넓게 사용된 동시에 今草는 왕성한 生命力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今草는 章草와 구별되는 독특한 외형적 특징이 있다. 금초는 장초의 결체의 기초 위에 橫折, 竪挑, 捺을 環轉으로 바뀌었다. 글자 획 중의 방절은 대부분 圓轉으로 대체되었고 동시에 隸書 筆意인 갈고리와 파책을 없애고 글자의 형체를 일필로 이루기도 하며, 연결되지 않는 부분도 서로 氣通하여 혈맥이 이어지는 등 용필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혁은 번잡함에서 簡略化로 나아가고 느림에서 빠름으로 나아가는 自然的인 요구에 의거한 것이다. 이것은 옛 것 중에서 쓸모 없는 것은 버리고 좋은 점을 찾아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 狂草 狂草는 今草와 다른 점이 많다. 글씨 쓰는 사람의 정서 변화와 章法, 그리고 글자와 글자, 항(行)과 항(行) 사이의 向背와 안배 및 호응의 요구에 따라 어떤 때는 윗 글자와 아랫 글자의 크기가 다르며 方圓과 斜正이 일치하지 않고 심지어는 結體가 해체되고 윗 글자와 아랫 글자가 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一氣貫通 해야 한다. 또한 狂草는 作品全體에 날아 움직이는 듯하게 전편에 통하도록 혼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윗 글자의 끝을 빌어 아랫 글자의 시작으로 삼는 결체 방법을 사용하여 이상한 형상이 흩어지고 모이며 여러 뜻이 내포되는 의취를 창조한다. 그래서 그것은 書藝家들이 고조된 感情을 나타내고 아름다운 의경을 창조하는데 편리한 것이다. (4) 草書의 大家들 2. 草書美學 정의 희로애락에는 각각의 분수가 있다. 기쁜 즉 기가 화목하여 글씨가 펴지고, 노한 즉 기가 거칠어 글씨가 험악해지고, 슬픈 즉 기가 답답하여 글씨가 오그라들고, 즐거운 즉 기가 화평하여 글씨가 아름답게 된다. 정에도 경중이 있는 것처럼 글씨의 염, 서, 험, 여에도 차이가 있으니 그 변화는 무궁하다(情之喜怒哀樂 各有分數 喜則氣和痍字舒 怒則氣粗而字險 哀則氣鬱而字斂 樂則氣平而字麗 情有輕重 則字之斂舒險麗 亦有淺深 變化無窮). 이것은 서예창작에 요구되는 작가의 철학있는 내면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書藝가 바로 그 성정과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정신을 발동하고 의지를 끌어올리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손과정은 서보에서 왕희지의 작품을 평하는 가운데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작품을 하는데 있어 乖함도 있고 合함도 있다. 合할때는 곧 流麗하고 乖할때는 곧 粗雜하다. 略하여 그 이유를 말한다면 각기 다섯 가지가 있다. 즉 五合과 五乖이다. 五乖가 같이 모인다면 생각은 막히고 손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五合이 充滿하면 정신은 融和하고 필은 流暢할 것이다. 이런 五合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자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좋은 조건 아래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조건은 아무래도 초서의 경우가 더욱 심할 것인데, 최상의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초서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다. (1) 形式美 대저 글씨를 쓰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먹을 갈면서 정신을 집중시키고 조용히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글자의 형태를 미리 생각하며, 크고 작고 높고 낮고 치키는 획과 평평하고 곧바르면서도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며 이들의 맥락을 서로 연결할 것을 계획한다. 이렇게 먼저 뜻을 정하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는 것이다. 만약 평평하고 곧바로 획이 아무런 변화 없이 서로 같아서 마치 주판알 같은 모양이 되어 위아래가 반듯하고 앞뒤가 고른 형상이 나온다면 이는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점과 획만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夫欲書者 先乾硏墨 凝神靜思 預想字形 大小偃仰 平直振動 令筋脈相連 意在筆前 然後作字 若平直相似 狀如算子 上下方整 前後齊平 此不是書 但得其點畵耳). 이것은 서예가 단순한 문자의 인쇄와 다르며, 生命力있는 形象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印刷體 문자에서 우리는 예술적 감흥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글자마다 長短, 大小, 疏密, 寬搾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글자가 살아있고 行氣가 통해야 한다. 만일 하나의 점이 잘못되면 미인의 한쪽 눈이 병든 것과 같고, 하나의 획이 잘못되면 장사의 발 하나가 부러진 것과 같으므로 서예가들은 모든 지혜를 짜내고 마음을 다하면서 정성껏 익힌 붓 솜씨에 마음을 맡겨 곡진한 미와 풍부한 의취로 작품을 표현해야 정지된 글자에 동세를 느끼게 해 향수자로 하여금 예술적 향수에 젖어들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書藝가 藝術作品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篆書와 隸書는 草書와 비교하면 矩規에 맞는 形式美를 갖는다. 결구가 엄격하고 복잡하며 용필은 매우 규칙적이다. 공간분할 문제에 있어서도 전서와 예서는 글자와 글자 사이가 일정하고, 한 글자의 획과 획 사이도 균등하게 분할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전서와 예서가 기본적으로 글자의 구성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均齊美를 바탕으로 한 서예체계라는 것을 드러낸다. 초서의 形式的 특징은 이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우선 結構나 用筆은 상당히 자유롭고 변화가 풍부하며 方·圓은 規矩에 들어맞지 않는다. 획들로 分割된 空間은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구성에서 탈피하여 일정하지 않고 자유롭다. 자유로운 空間分割과 함께 글자모양이 한쪽으로 기운 듯한 형세를 취함으로써, 이전의 整齊된 均齊美를 깨뜨리고 있다. 특히 한쪽으로 기운 듯한 글자의 형상은 한 쪽 부분이 다른 쪽보다 크거나 획들이 밀집된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左右對稱의 틀을 깨뜨리고 있다. 이에 유희재는 서개에서 草書의 결체는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중심이 잡혀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상부에서는 위로 치우치고 또는 아래로 치우치는 것이 있고, 하부에서 지나치게 길고 또는 지나치게 짧은 것이 있으며, 변과 방이 다투어 기대고 서로 양보하는 것이 있는 등 모두가 그것이다.(草書結體 貴偏而得中 偏如上有偏高偏低 下有偏長偏短 兩旁有偏爭偏讓 皆是.) 라고 하여 정제된 아름다움보다 움직이는 가운데 중심을 잃지 않는 均衡美를 강조했다. 이와 같이 초서는 不均衡속에서 均衡을 찾는 書藝美學의 결정체이다. (2) 生動美 발돋움하는 새가 멈칫하며 금방 날려는 듯하고, 교활한 짐승이 놀라 금방 달릴 듯한 모습이다. ( 企鳥 志在飛移 狡獸暴駭 將馳未奔) 마치 산 벌이 쏘려고 틈새를 엿보고, 나는 듯이 구멍으로 들어가는 뱀이 머리는 없고 꼬리만 끌 듯이 한다(若山蜂施毒 看隙緣峨 騰蛇赴穴 頭沒尾垂). 이러한 형상적 비유는 강렬한 運動感에서 오는 왕성한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초서의 運動感은 草書의 結體에 있고, 이 結體를 구성하는 요소로 생동감 있는 먹의 운용 즉 농담이나 고습의 변화와 運筆의 리듬감 등에서 나온다. 이 리듬감은 운필의 경중과 글자 상호간에 수미상응하며, 구성에 있어서 참치, 소밀 등에 의해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具體的인 文字의 象과 意가 書勢 중에 통일되어 表現될 때 가능한 것이다. 漢代의 書藝家 蔡邕은 書勢의 형식을 9종류의 표현 방법으로 나누었다. 草書의 우월성은 바로 강렬한 運動感을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書藝가 표현하는 情感의 可能性을 극대화시켜 본래 두 공간에서 시각에 호소하는 書藝術로 하여금 時間藝術에 가까운 음악적 특징을 갖추게 하는데, 이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氣通에 의한 생동감과 조화미와 더불어 자연스러운 율동이 종이 위에 펼쳐질 때 氣韻이 生動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3) 意象美 書는 말을 극진히 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극진히 하지 못한다. 그러면 성인의 뜻을 볼 수 없느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성인은 象을 세움으로써 意를 다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然則聖人之意 其不可見乎 子曰 聖人立象 以盡意) "書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文字란 것은 무형한 말을 볼 수 있도록 空間化한 것이요, 또 言語란 것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의 심리작용을 時間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옛날 주역을 지은 성인의 의지작용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인가? 공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옛날 성인은 여기서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純粹動作인 象을 취하여 의미를 다 드러냈다 라고 하여 象과 意의 관계를 설명하고 하였다. 이에 왕필은 <周易略例. 明象>에서 말하기를 무릇 象이란 것은 意에서 나오는 것이고, 言이란 것은 象을 밝히는 것이다. 意를 극진히 함에는 象만한 것이 없고, 象을 극진히 함에는 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言에 집착하면 象을 알 수 없고, 象에 집착하면 意를 알 수 있으며, 言에 집착하지 않는 자만이 象을 얻을 수 있다.(夫象者, 出意者也 : 言者, 明象者也. 盡意莫若象, 盡象莫若言... 是故, 存言者, 非得象者, 存象者, 非得意也… 然則 忘象者, 及得意者也 : 忘言者, 及得象者也) 라고 했다. 이 말의 포괄적인 뜻은 언어(言)와 형상(象)과 생각(意)의 삼자 관계를 비유하여 무릇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언어나 형상의 세계를 초극할 수 있는 궁극의 사유세계에 도달해야 된다는 뜻이다. 서예는 문자를 쓰는 것이지만 言이 아니라 象인 것이다. 象으로 말미암아 意와 통하므로 표의의 작용이 있다. 玄學家들의 意, 象, 言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書藝術의 지위는 언어 문자를 매개로 하는 문장 학술보다 높다. 이점을 명백히 하면 서예술이 어떻게 현학이 성행한 위진남북조 시대에 극단적으로 중시되고 고봉에 이르렀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藝術形象이란 象과 意가 융합된 것으로 外部的 物象이 創作主體의 內在的 審美要素와 융합하여 새로운 美的 境界를 이룬다. 초서의 형상됨에 아름답기는 은 갈고리(갈고랑이, 낫) 같고 나부끼기는 놀란 난새 같고, 날개를 펴고 아직 날지를 않는 것은 거동이 다시 편안한 것 같다. 벌레와 뱀 그리고 규룡이 꿈틀거리면서 혹 가고 혹 돌아오는 것 같고, 날씬하고 아리따운 것은 파리한 것 같고 그 한가롭게 유람하면서 돌아봄에 잠깐 바르고 잠깐 기울면서 기린과 천리마가 성을 내어 고삐를 핍박하는 것 같고 바닷물이 움푹 들어가고 불쑥 나와 그 파도를 드날리는 것 같다.(草書之爲狀也 婉若銀鉤 漂若驚鸞 舒翼未發 若擧復安 蟲蛇 或往或還 類 娜以 奮 而 桓桓 及其逸游盼向 乍正乍邪 騏驥暴怒逼其 海水 隆揚其波) 라고 하여 초서를 자세하게 형용하였으며, 또 손과정은 대저 바늘을 매달고 이슬을 드리운 것과 같이 서로 다른 모양과 번개가 치고 돌이 떨어지는 기이함과 기러기가 날고 짐승이 놀라는 자태와, 난새가 춤추고 뱀이 놀라는 자태와, 언덕이 끊어져 산봉우리가 무너지는 형세와, 지형에 임하고 마른 고목에 의지하는 모양을 본다. 어떤 때는 무겁기가 산봉우리의 구름 같고, 어떤 때는 가볍기가 마치 매미의 날개와 같다. 인도할 때는 샘물이 흘러내는 것 같고 머무를 때는 태산이 안정되어 있는 것 같다. 필 획이 가늘고 부드러울 때는 마치 초승달이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필 획이 많을 때는 뭇별들이 은하수에 줄지어 있는 것 같다( 孫過庭 <書譜> 觀夫懸針垂露之異 奔雷墜石之奇 鴻飛獸駭之資 鶯舞蛇驚之態 絶涯頹峰之勢 臨危 據槁之形 或重若崩雲 或輕如蟬翼 導之則泉注 頓之則山安 纖纖乎似初月之出天厓 落落乎猶衆星之列河漢). 라고 하여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意象美의 表出은 다른 書體에 비해 草書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형식상의 규율이 자유롭기 때문에 書藝家의 창작활동에 운용의 폭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잘 쓰여진 草書 작품 앞에 서면 全身이 저려오는 듯한 전율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느낌은 自然 物象이 작가의 內面에 들어가 새롭게 해석된 서정의 정감이 書藝家의 필묵에 의해서 생명을 얻어 살아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력이 왕성하면 왕성할수록 아름다움은 풍부해지고 생동감 있는 藝術이 되어 書藝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書藝術의 魅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 自然美 먼저 노자에 등장하는 자연을 보면 유유하도다! 아마 말을 아끼는 것 같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면 백성들은 모두 "우리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노자 17장 -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 我自然 )" 도와 덕이 존귀한 것은 대개 명령하지 않아도 항상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노자 51장 -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노자 25장 -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이상에서 노자가 말하고자 한 自然은 自然現象의 自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天地萬物을 存在하고 움직이게 하는 道의 本質的인 性向을 묘사한 것으로 "스스로 그러한" 또는 "자연스러운"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흙과 물과 공기 등은 自然物이지 自然이 아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흙과 물과 공기 등이 존재하고 변화하도록 하는 道의 本性이 바로 自然이다. 사람이 自然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木手는 나무의 자연스러운 本性에 따라 나무를 다루어야 하고, 石工은 둘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돌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도공은 흙의 자연스러운 성질에 따라 흙에 짓이기어 그릇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聖人은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나 사람의 자연스러운 성질이나 성향에 따라 다스린다면 위대한 작품을 이루어낼 수도 있다. 장자의 丁의 解牛가 그렇고, 工人 가 그린 원이 그러하다. 기교가 점차 원숙해지면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손놀림이 순조로웠다. 이것은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마음먹은 대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지로서 일종의 心物合一이니, 장자 천지편의 輪扁이 말한 바 '得之手而應於心'의 경지이다. 그래서 손이 멈추어야 할 곳에서 저절로 멈추고, 신이 마땅히 통해야 할 곳에서 저절로 움직이니, 이것은 손과 발이 마음과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표현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藝術美이지만 스스로 그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그렇게 막힘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自然美가 표현되는 것이다. 한편 書論에서 처음 自然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蔡邕으로 그의 九勢중에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무릇 書라는 것은 自然에서 비롯된다. 自然이 이미 성립되면 또 陰과 陽이 생기게 되고, 陰과 陽이 생기게 되면 형세가 나타난다.(夫書肇于自然 自然旣立 陰陽生焉 陰陽旣生 形勢出矣) 또 이 때 붓을 들어 글씨를 쓰면 오는 형세는 막을 수 없고, 가는 형세는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勢가 神에 의해 움직이고, 形이 勢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채옹은 神의 주도작용을 강조했는데 그 목적은 勢를 발동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勢가 있어야만 形이 이루어지고, 神은 직접적으로 形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勢를 통해야만 하고, 神과 勢가 合一이 되면 바야흐로 神과 形이 하나가 된다. 形은 靜態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 勢는 動態적 감각이다. 運筆은 勢이고, 運筆의 결과는 形이다. 그러므로 書藝는 靜態이지만 動態인 것이다. 이런 일련의 창작활동에 대해 張懷瓘은 <六體書論>에서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形을 나타내는 것을 象이라고 한다. 書藝는 象의 규범을 따른다. 마음은 物象을 妙探할 수가 없다. 墨은 마음을 曲盡할 수 없다. 생각으로서 이것을 기도하고, 勢로서 이것을 살리고, 氣로서 이것을 和合하고, 神으로서 이것을 끌어내고 合하여 裁成한다. 이러한 견해는 단순한 書寫를 넘어 自然과 合一할 때 비로소 自然美 넘치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書藝는 자연의 形象에 의해서 취상된 것을 대상으로 성립된다. 그런데 마음은 형상의 精妙한 곳까지 찾아 맞출 수는 없다. 筆墨은 또 중심에 얻은 것을 모두 자세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여기서 사고를 반복하여 이것을 구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姿態에 의하여 이것을 살려 양육하고 기세를 가하여 화합시키고 힘이 넘쳐흐르는 정신에 유인된다. 이러한 활동을 하여 이것을 교묘하게 조화하여 統一體를 만든 이것이 創作活動이다. 이것은 自然界에서 본 번개, 떨어지는 암석, 비상하는 큰 새, 질주하는 맹수, 춤추는 영조, 굴곡을 가지면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뱀, 힘이 용출하는 샘, 안정된 산세 등의 자연 현상과 변화를 관물하여 內面的으로 形象을 재창조하여 표현한 것으로 자연 현상처럼 전혀 막힘이 없는 상태 즉 포정이 解牛하는 것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草書美가 이런 자연스런 美를 表出하는 書體로 적합한 것은 이미 논의한 바 있는 作家의 情感의 表現의 폭이 넓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당나라 서예가 장욱의 초서를 보고 한유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날 장욱은 뛰어났다. 그는 초서 이외의 다른 기예는 전혀 힘쓰지 않았다. 즐거울 때나 화났을 때, 곤궁할 때, 근심에 싸여 슬퍼하거나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원망과 한이 서리거나 사모의 정이 솟아오를 때, 얼큰히 취하여 무료해질 때, 불평이 가슴속에 차 오를 때, 그는 반드시 초서를 통하여 그의 감정을 발산하곤 하였다. 사물을 바라보고, 산수·바위산·골짜기를 바라보고, 번개·천둥을 바라보고, 가무·전투를 바라보고 천지만물의 변화를 바라본다. 기쁘거나 놀라게 할 만한 일들이 빠짐없이 모두 초서 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장욱의 서예는 그 변화가 입신의 경지에 들어간 것 같으며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送高閑上人序> 라고 하여 장욱의 草書에는 人工美를 超越한 神의 경지라 하여 그가 이룩한 초서는 自然美 그 자체라 하였다. 한자는 도화 성질을 띤 象形文字로부터 발전하여 점과 획을 부호로 삼으면서 추상 성질을 가진 네모난 文字에 이르렀다. 이는 비록 고른 均衡과 공정한 인공 색채를 띠고 있지만 거기에는 自然的인 취미가 포함되어 있다. 글자에 자연적인 形體가 있는 것처럼 글씨에 자연적인 形勢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품은 막힘이 없고 천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자는 "대단히 솜씨, 좋은 것은 서투른 것 같고 위대한 논변은 어눌한 듯하다.(노자 45장 - 大巧若拙 大辯若訥)"라고 하였으며, 왕필이 이에 주하기를 대단히 솜씨 좋은 사람은 자연에 말미암아 그릇을 완성하고, 기이하고 극단적인 것을 만들지 않으므로 졸렬한 듯하다. 위해한 논변은 사물이나 사람에 따라서 말하고, 자기가 만든 것이 없으므로 어눌한 듯하다(大巧因自然以成器, 不造爲異端, 故若拙也. 大辯因物而言 己無所造 故若訥也)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자연 그 자체는 아니다. 극단의 기교를 거친 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봉은사의 板殿을 두고 추사 예술의 결정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書藝는 人間의 感情, 本性을 표현하는 藝術로 자연과 同一視하는 것은 손과정도 書譜에서 주장하고 있다. 정이 속에서 움직여 言語가 되고 이들이 風, 騷의 의미를 집회한다. 양지가 기분 좋게 느껴지고, 음지가 스산한 것은 天地之心에 바탕을 두고 있듯이 草書도 변화 중에서 感情을 나타내는 고도의 자유로움이 있다.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제약하는 有無形의 엄격한 규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로움을 제어하는 것이 草書의 美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기교를 고도로 숙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마음대로 표현해도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從心所欲不踰矩이며, 장자가 제시한 탈속의 大美 逍遙遊의 경지로서 사람이 자연이고, 자연이 사람인 상태이다. 여기서 창작되는 藝術作品은 인간이 創作한 것이지만 자연미가 넘치는 것이다. 이런 自然美의 俱現에 그 어떤 것보다 草書가 가장 적합한 書體인 것이다.
草書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書體로 대중에 의해 流行하게 되어 美的 要求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技巧面에서 發展시켜 마침내 藝術이 되게 하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書가 藝術로서 인식하게 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草書의 탄생은 書藝術의 發展史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草書는 처음으로 서예가 일종의 고도의 자유로운 感情을 펼쳐 書藝家의 개성을 표현한 예술로 더 이상 機械的인 성질을 띠고 있는 技藝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崔瑗에 의해서 저작된 草書勢는 書論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草書勢에서 주장한 審美態度는 한편으로 글씨가 문자 형식의 개념과 의의를 전달하려는 실용적인 功能을 초월하여, 獨立的인 審美의 價値를 갖도록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싹트기 시작한 중요한 書藝美學은 서예로 하여금 가슴속의 정감을 표현하는 능력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데 이것은 채옹의 筆論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書藝美學적 根據를 마련한 것이 결국 草書의 발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書理論家인 趙壹에 의해서 草書가 최초로 비난받은 것도 書藝가 大衆性을 바탕으로 한 藝術性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이런 草書는 漢代의 史遊, 杜度, 崔瑗, 張芝에서 출발하여 東晋의 王羲之에서 확립되고 王獻之, 智永, 張旭, 懷素, 孫過庭, 등으로 이어지면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데 특히 손과정의 書譜는 현존하는 書論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 몇몇 書藝家들만이 草書藝術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 그들 뒤에 가려져 있는 많은 民衆들의 草書에 대한 사랑과 노력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유희재는 書慨에서 "書家에는 篆聖, 隸聖은 없어도 草聖은 있다.(書家無篆聖隸聖 而有草聖)"라고 하여 草書의 優秀性과 藝術性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 초서예술 의 수월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정체된 것 같다. 이것은 草書 학습의 難解性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時代의 조류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발전을 멈추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몇몇 草書 企劃展이 열려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는 있지만… 결국 발전의 원동력은 저변이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개인전, 그룹전, 공모전을 막론하고 書藝展의 경우 일단 관람객이 적다는 것이다. 이제 학문의 원천이며 精神文化의 꽃인 書藝에서 文學, 敎養, 敎育, 哲學 등의 요소는 사라져 가는 것 같다. 그 속에는 단지 點과 劃, 黑과 白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우리 민족은 좋은 소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直線은 人間이 만든 것이고, 曲線은 신이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이 만들어 내는 線은 어떤가. 정말 아름답지 않는가. 고려청자의 線이 그러하고, 고궁의 지붕 선이 그러하다. 특히 여인네의 저고리는 전체적으로 곡선의 미를 보여주는 가운데 직선이 절묘하게 파고 들어가 새로운 미를 창출해낸 경우이다. 가슴과 소매로 타고 올라가는 곡선, 목을 휘감아 내려오는 曲線에 아무 거침없이 쭉 뻗은 옷고름의 直線이 상쾌한 調和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만들어내는 線은 엄숙해야 할 때는 엄숙한 線을, 당당해야 할 때는 당당한 線을, 상쾌해야 하거나 편안해야 할 때는 상쾌하고 편안한 線을 適材適所에 구사하며 그에 맞는 새로운 線을 창출했다는 것, 이것이 우리 線의 美學이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매일 접하는 大自然에서 연유하겠지만, 어떻든 우리 민족의 조형의식 속에는 아름다운 線이 內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草書가 우리 民族에게 가장 잘 맞는 조형예술일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붓을 잡고 초서를 쓰자. 그래서 수 천년 전 漢代의 趙壹이 초서에 맹렬히 비난을 가했듯이, 이 시대의 또 다른 趙壹이 나와서 초서를 비난하는 그래서 초서가 서예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잡지>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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